읽기 전,

 

1. 여러분이 읽는 이 글은 과제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과제이다.

2. 여러분은 나란히 앉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3. 여러분은 아무것도 아니다.

4.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5. 하지만 여기서 얻는 의미는 없다.

6. 그러므로 당신은 속은 것이다.

 

페터한트케 사진, 출처 = https://www.nytimes.com/2016/12/30/books/review/peter-handke-moravian-night.html

  

1

 내가 읽은 책은 아무 내용이 없다. 65페이지에 걸친 장황한 무의미를 담고 있다. 이 글에 대한 소회를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은 과제가 아니다. 어쩌면 불가능한 과제다. 내가 『관객모독』을 고른 이유는 단 하나다. 페터 한트케의 헤어스타일 때문이다. 불가능한 과제는 문장의 의미 그대로 과제를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의미만을 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단 말이다. 결코 과제에 대한 반항이 아니다. 내 생각에 책에 담긴 의미가 항상 중심적인 개념을 내포해야 한다는 명제는 엉터리다. 그런 의미가 없으면 텍스트의 가치는 없어질까? 난 이 책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서평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편견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2

 독자들에게 묻는다. ‘출판문화론’에서 요구하는 가족독서릴레이가 함의하는 것은 무엇일까. 강의실 대형스크린에 낭독될 수많은 서평의 의미와 무의미는 과연 뭘까. 많은 수강생은 책상에 차곡차곡 앉아서 무표정으로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릴 것이다. 난 여러분에게 말을 걸고 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 글을 낭독하는 순간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바보처럼 가만히 앉아 있다. 내 말을 끊지 못한다. 나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그저 멀뚱멀뚱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다. 수군거리거나 휴대전화를 만진다. 여러분은 질문할 권리가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권리가 있다고 막연하게 믿는다. 하지만 강의 시간이 끝나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 강의실을 벗어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질문할 권리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난 여러분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다. 여러분의 반응은 ‘무의미’ 그 자체이다. 나를 향한 야유, 비난, 갈채, 돌팔매질도 없다. 여러분은 오직 이 발표행위를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나에게 돌을 던지지 않는다.

 

3

 과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이 책을 읽은 친구는 현재까지 둘이다. 친구 둘은 웃으면서 재미있다고 했다. 난 이 책에서 그런 반응을 원하지 않았다. 아무도 이 책을 찢어서 휴지통에 던지지 않았다. 이 책 겉면에는 한트케의 사진과 이 텍스트가 가진 의미를 언급했다. ‘치열한 언어 실험을 한 문제작’, 한트케가 없는 독일 문학은 상상할 수 없다는 디차이트의 평가는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내 친구는 이 책의 문장력을 칭찬했고, 막연하게 나를 응원했다. 아무도 이 책에 대해 욕하지 않는다. 쏟아지는 칭찬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난 가족독서릴레이가 있기 훨씬 전부터 이 책을 읽으라고 권유했다. 친구들이 이 책을 전부 읽기 전까지 이 과제는 끝나지 않는다. 가족독서릴레이를 함께한 친구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친구들에게 고맙다. 하지만 친구들이 나를 모독하지 않아서 아쉽다. 한 명을 경찰을 꿈꾸는 친구이고, 다른 한 명은 대기업 취업을 희망하는 친구다. 이런 부차적인 사실 역시 무의미하다. 그들에게 관객모독이라는 작품은 그저 심심한 일상에 재미를 준 작품이다. 나는 관객모독을 읽고 그들과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다. 그들과의 우정이 변치 않았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만족한다. 변하지 않은 우정을 확인했다.

 

4

 이 순간에도 여러분들은 아무도 책상을 박차고 나가지 않는다. 장황한 발표가 끝나길 기다린다. 사실 나는 여러분에게 고백할 것이 있다. 사실 발표자는 여러분이고 나는 청중이다. 난 여러분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 이 서평을 발표하는 동안, 한트케가 말하는 『관객모독』의 의미를 말하는 동안, 이 서평이 얼마나 무의미한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바란다. 청중과 발표자가 바뀐 이 상황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가. 단지 의미만을 전달하는 서평의 발표는 여러분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전위적인 방식의 서평이 아니고서는 한트케가 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발표자를 기다리는 청중의 기다림에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여전히 대답이 없다. 표정이 없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세밀한 관심을 기울였음에도 아무 반응이 없는 건 유감스러운 일이다.

 

5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서평이 아니다.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단지 관객모독이 가지고 있는 그대로를 느껴야 한다. 즉, 당신이 지금 여기에서 느끼는 모욕감, 혐오감, 회의감을 표출해야만 이것은 서평이 될 수 있다. 이 글에 대한 당신의 반응이 바로 『관객모독』의 서평이 된다. 그것을 간과하는 사람들은 여기에서 가만히 앉아서 이것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계속 기다린다. 당신의 여러 반응에 관해 당신을 손가락질하고 꾸짖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난 발표를 통해 당신의 서평을 기다린다. 이 발표가 끝나기 전에 이미 강의실을 박차고 나가거나, 발표를 중단시키는 학생이 있다면 난 그 사람에게 박수를 보낼 것이다. 응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6

이 발표가 끝나는 순간, 여러분들은 한트케의 『관객모독』을 읽은 것이나 다름없다.

<출판문화론 2017 / 문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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