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읽었다. 이 소설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김승옥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산문시대'라는 동인을 만들어 낸 주역이자, 김현, 이청준과 함께 대학 시절 글을 썼고,  4·19 혁명을 겪은 사람이고……. 이런 사실은 인터넷으로 찾으면 듣는 사람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장황하게 설명할 수 있다. 또한 무진기행의 피상적인 이야기 나열도 서평의 질을 떨어뜨리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극단적으로, 이 소설을 김승옥이 썼는지, 김옥승이 썼는지를 따지는 문제만큼이나 부질없는 일도 없다. 우리는 이 텍스트를 읽으면서 나만이 할 수 있는 해석의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1960년대의 한국과 이데올로기, 역사적 배경 역시 불필요하다. 특히 ‘김승옥은 역시 김승옥이지!’라고 떠드는 사람의 말은 더더욱 들을 필요가 없다. 왜냐면 김승옥이라는 사람을 ‘역시’라는 확정적인 단어에 위치시키는 행위가 해석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타성에 젖은 독서, 역사적, 사회적 상황을 고려한 소설의 해석은 낡았다. 내 마음속에 김승옥은 없다. 아니, 김승옥은 죽었다. (실제로 김승옥은 살아있다) 난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글쓰기를 0(zero)에서 시작할 것이다. 눈을 부릅뜨고 무진기행에 등장하는 무진이라는 곳에 온몸을 던져보기로 했다.

 

 1. 불가능의 공간, 무진    

              

 내가 좀 나이가 든 뒤로 무진에 간 것은 몇 차례 되지 않았지만 그 몇 차례 되지 않은 무진행이 그러나 그때마다 내게는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거나 하여튼 무언가 새 출발이 필요할 때였었다. 새 출발이 필요할 때 무진으로 간다는 그것은 우연이 결코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진에 가면 내게 새로운 용기라든가 새로운 계획이 술술 나오기 때문도 아니였었다. 오히려 무진에서의 나는 항상 처박혀 있는 상태였었다. 〔……〕 문득 한적이 그리울 때도 나는 무진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럴 때의 무진은 내가 관념 속에서 그리고 있는 어느 아늑한 장소일 뿐이지 거기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다. 무진이라고 하면 그것에의 연상은 아무래도 어둡던 나의 청년이었다.
 김승옥, 『무진기행』, 민음사, 1980, pp.12~13.

 

 역사적 맥락, 작가의 정신적 산물인 ‘작품’이라는 개념은 접어두자. 지금 책상에 앉아 있는 임의의 상황에 놓인 당신의 입장에서 책을 읽어 보자.

 무진은 불가능의 공간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내면의 도피처이다. 우리는 지긋지긋한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꿈꾸지만 완전한 도피는 실현 불가능한 꿈이다. 주인공은 무진에 간 것이 아니라, 무진에 가는 꿈을 꾼 것일지도 모른다. 무진기행의 종착역은 어디인가? 아마 주인공의 직장이 있는 서울이 될 것이다. 그는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한다. 떠돌면서 자신이 처한 현실(서울) 상황을 떠올린다. 현실 상황은 어떤가. 지긋지긋한 일상의 반복과 인간관계(가족도 포함)의 환멸을 느끼지 않고는 못 배기는 권태롭고 허무한 곳이다. 내가 자주 가는 제주시청도 그렇다. 어느 경기도의 위성도시와도 다를 바 없는 곳에서 주인공의 모습이 자꾸 오버랩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무진기행을 읽으면 읽을수록, 무모하게 나는 무진에 가는 주인공처럼 대학로를 찾았다.     

 

 2. 무진, 대학로

 

 무진에 오기만 하면 내가 하는 생각이란 항상 그렇게 엉뚱한 공상들이었고 뒤죽박죽이었던 것이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지 않았던 엉뚱한 생각을 나는 무진에서 아무런 부끄럼 없이, 거침없이 해내곤 했던 것이다. 아니, 무진에서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쩌고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생각들이 나의 밖에서 제멋대로 이뤄진 뒤 나의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듯했다.
김승옥, 『무진기행』, 민음사, 1980, p.12.

 

 시청 탐 앤 탐스와 올리브영을 가르는 큰길은 목적지를 고민하거나 목적지 자체가 없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네온사인, 가로등이 밝아오면 또렷해지는 사람들의 표정만큼이나 그림자도 짙어진다. 화려한 옷차림과(사실 제주도에 있는 학생의 대부분은 옷차림이 비슷하다) 상표를 알 수 없는 향수는 거리의 일부가 되지만, 그렇게 자신을 노출시킬수록 드러나는 것은 땅바닥에 붙어있는 그림자다. 어두운 내면은 모두에게 보편적인 감정이다. 아마 무진에 도착한 주인공의 내면 역시 그렇게 짙어졌을 것이다. 하나같이 출출한 속을 달래기 위해 술집, 밥집, 여관을 전전하는 젊은이들의 굶주림을 보며, 이 장소가 가지는 무의미함과 부질없음이 무진과도 닮아있다는 걸 느낀다. 대학로의 학생들은 무진기행의 주인공처럼 풀이 죽은 듯하다.

 물론 무진은 촌이고 대학로는 나름 도심이란 점에서 분명히 표면적으로는 엄연히 다른 곳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긋지긋해하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난 공간이란 점에서 무진과 대학로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 나는 방 안에서는 하지 못했던 생각을 대학로에서 곧잘 해낸다. 그런 부질없는 생각은 나만하는 것이 아니다. 시장을 방불케 하는 사람 많은 카페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들어보면 느낄 수 있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지금 당장 고민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을 구태여 바깥에 나와서 이야기한다. 또한 그들은 특정한 약속이 없는 한 이유 없이 시청의 골목을 서성거린다.

 

 

 3. 무진기행, 북촌방향

 

 사람들은 도피처가 되었으면 하는 장소(무진이나 대학로)가 가지는 부질없음을 알지만, 미련하게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다. 홍상수의 영화 ‘북촌방향’도 같은 맥락의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성준(유준상)도 무진기행의 주인공과 처지가 비슷하다.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 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사리골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김승옥, 『무진기행』, 민음사, 1980, p.41.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이지만 각별함은 없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단순하다. 바로 그들이 생활하는 일상적인 공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일탈뿐이다. 외로움에 사무쳐 다른 여자와 쉽게 잠자리를 가진다거나,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나 삶의 푸념을 늘어놓는다든가 하는 일들은 무진기행과 북촌방향에서 같이 벌어진다. 그러면서 그들은 다짐한다.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며 다짐을 굳힌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킬 수 없다. 혈서를 쓴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나는 주인공이 무진을 다시 찾아올 거라고 굳게 믿는다. 북촌방향의 주인공 역시 북촌을 다시 찾아올 것이다.(다시 돌아오는지 그 여부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알 수 없다)

 그들은 벗어날 수 없다. 물리적으로만 일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뿐 공회전하는 몸과 공허한 감정 소모를 해소할 길이 없다. 그들에게는 이정표만 있고 목적지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무진에 도착해서도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무진기행은 제목을 ‘무진방향’이라고 지어도 어울릴 것이다. 무진이라는 곳은 특정한 위치의 장소가 아니다. 주인공이 도피하고자 하는 대략의 공간을 말한다. 이곳에 정확한 지점을 포착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우리 역시도 불가능한 지점 주변을 서성이며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는 ‘공회전’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보자. 실제로 외로운 몸들은 섞이지 않고 권태로운 감정만 커지지 않는가. (모든 일탈을 성적인 욕망을 해소하고자 하는 의지라고 보는 것은 아니다) 욕망은 대상을 향하지만 대상은 욕망을 완전히 채워주지 못한다.

 

 4. 인간의 보편적 외로움

 

 무진은 주인공에게 핑곗거리다.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한 주인공에게 무진은 대도시든 소도시든 그 규모보다 거기에 담긴 자신의 예전 상황을 반추하는 장소다. 어두운 자신의 청년 시절을 떠올리는 기분이란 어떨까? 난 아직 청년이기 때문에 소설 속 주인공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가 느꼈을 쓸쓸함이란 감정은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때 내가 쓴 모든 편지들 속에서 사람들은 ‘쓸쓸하다’라는 단어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단어는 다소 천박하고 이제는 사람의 가슴에 호소해 오는 능력도 거의 상실해버린 사어같은 것이지만, 그 무렵 내게는 그 말밖에 써야 할 말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김승옥, 『무진기행』, 민음사, 1980, p.36.

 

 주인공은 외로운 자신의 상황을 떠벌리고 다니는 게 외로운 자신에게 불행을 덧붙이는 일이란 것을 알까. 하지만 ‘쓸쓸함’이라는 단어 외에 ‘쓸쓸함’을 대체하거나 그것을 보다 잘 표현할 수 있는 탁월한 단어가 없기 때문에 ‘쓸쓸함’이란 말은 더욱 선명해진다. 외로움은 너무 흔한 것이다. 외로움을 겪지 않은 사람은 없으며, 이에 대해 가타부타할 말은 없다. 그러나 이 외로움은 남의 일처럼 제삼자 입장에서만 헤아릴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다 알면서도 미련하게 우리는 이 감정에 대해 얘기한다. 가슴에 호소하는 능력을 상실해버린 ‘외로움’이 실제로는 우리를 너무 괴롭게 한다. 다른 단어로 이 감정을 표현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외로운 상황을 외롭다고 말하는 동어반복만이 이 감정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방법 이리라. 이 상황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외로움에는 괴로움도 동반된다. 우리는 이 외로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5. 무진, 북촌에서의 실패

 

 무진은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한 공간이다. 물론 무진이라는 공간에 있다고 해서 외로움이 자연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무진은 욕망과 외로움을 해소하는 공간이지만, 주인공은 무진에서의 추억은 무진에 두고 간다.

 

 사실 나는 나 자신을 알 수 없었다. 사실 나는 감상이나 연민으로서 세상을 향하고 서는 나이도 지난 것이다. 
김승옥, 『무진기행』, 민음사, 1980, p.37.     

 

 이 구절은 주인공이 서울로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무진에서 음악 선생과 한바탕 진한 사랑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감상이나 연민을 일으켜 설령 같이 서울로 상경하게 되면 이 상황은 욕망과 외로움 그 이상을 감당해야 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그는 무진을 떠나면서 음악 선생에 대한 사랑 혹은 호감을 접는다. 음악 선생 역시 주인공에 대한 사랑 혹은 호감을 보였다. 그녀도 서울로 자신을 데리고 가라며 주인공을 보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자리가 끝나고 여자는 남자에게 서울로 가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자기 자신이 싫어진 적이 있는지 묻는다. 과연 여자는 어떤 의중으로 남자에게 그런 질문을 했을까? 여자는 질문 그대로 자신에 대한 증오와 서울 상경에 대한 비현실성을 주인공처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여자는 남자보다 먼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서울에 가고 싶다는 말은 결국 서울에 상경하지 못했기 때문에 단순 발화 행위가 된다. 서울 상경이 무진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의 의미로 볼 수 있으나, 그건 주인공과 사랑을 이어가겠다는 욕망의 의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의 사랑은 일탈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 욕망은 무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욕망은 소설 마지막 부분의 찢어진 편지와 같이 실패한다.

 

 서울로 데려가라는 말은 또한 일탈의 무책임함을 보여준다. 홍상수의 영화도 그런 부분이 나타난다. 성준(유준상)은 선배가 소개하여준 술집 사장과 동침하면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감상과 연민의 감정을 말로 표현한다. 이 얼마나 무책임한가. 그들은 심지어 끝을 알면서도 그렇게 허무하게 흩어질 말을 계속한다. (그런 면에서 김승옥의 텍스트는 감정을 매우 절제하고 있다. 또한 북촌방향의 주인공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여: 오빠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요.
남: 넌 너무 착해.
여: 나 오빠랑 안 맞을 줄 알았어.
남: 응. 왜?
여: 오빤 너무 남자 같애. 정말 남자야.
남: 내가 뭐가, 넌 너무 예뻐.
여: 오빤 처음 볼 때부터 위엄이 있었어. 정말 남자야.
남: 네가 행복해야 해. 정말이야.
여: 고마워요. 오빠 내가 예뻐?
남: 어. 난 네가 누군지 알 거 같아. 네 속은 진짜 너무 너무 착해. 천사야.
여: 누군지 모를텐데?
남: 그래?
여: 오해하지 마요. 날 너무 좋게만 보니까.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면이 있잖아요.
남: 나는 네가 그냥 누군지 알 거 같아. 넌 착해 이 바보야.
여: 내가 말로 처음엔 잘 표현을 못하거든. 근데, 오빠랑 있으면 내가 바라던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 거 같아. 오빠처럼 이렇게 나 쳐다보던 사람 없는 거 같아. 정말로. 예전에도 없었던 거 같아.
남: 사랑해. 네가 행복해야 해. 내가 정말 널 그렇게 해주고 싶어.
여: 고마워요

홍상수, 북촌방향의 대사 中

 그들은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을 욕망한다.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욕망한다. 우리 젊은이들의 사랑이라고 다를까. 존재의 가벼움으로만 점철된 밤거리에서 연일 무책임한 사랑이야기가 오간다. 그러면서도 그런 무책임함은 순간적인 감정이거나 가벼운 일탈이라며 비난한다. 그러나 일시적인 사랑은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의 어려운 결정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비난받을 일이고 분명 상처를 주는 일이지만, 우리는 분명 그런 것들을 부질없이 욕망하고 있다. 왜? 그건 알 수 없다. 욕망하는 행위는 자기 자신을 찾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욕망 끝에 돌아오는 자신에 대한 환멸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렇게  불가능한 것들을 욕망할 공간과 대상을 욕망한다. 각자 밀봉된 장소에서 그런 자신의 욕망을 펼칠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나를 찾고자 하는 욕망은 어쩌면 목적이 없이 떠도는 가운데의 '사색'행위가 아닐까. 무진기행과 북촌방향의 실패는 이런 '사색'을 담고 있다.

 5. 나(욕망)를 찾는 여행

 

 '자신만의 공간', 무진에서 자신을 찾는 여행이 무진기행 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 수 없다. 도피처라고 생각했던 제주시청의 대학로는 개성이랄 것 없는 심심한 사람들의 시선이 오가는 곳이다. 그런 시선에 짓눌리는 날이면 하필 좁은 어깨에 가방끈이 유난히 흘러내린다. 그래도 고쳐 매고 걸었다.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 나는 계속 길거리를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먼발치에서 지인을 보게 되면 휴대전화를 정신없이 만지는 시늉을 하면서 모른 척했다. 아무도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쓰는 글 역시도 공허한 말속에 어슷하게 기울어지는 그림자처럼 왜곡될 것이다. 무진기행에 대한 내 생각은 하나의 해석으로 남을 수 있지만, 욕망 자체에 대한 해석은 불가능하다. 욕망은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욕망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는 것이다. 이렇게 청승맞게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쓸쓸함을 해소할 길이 없음에도 난 걸음을 멈출 수 없다. 결국 나는 자취방으로 돌아가겠지만, 지긋지긋한 일상을 살아야겠지만, 혹시나 나와 같이 혼자 목적지 없이 떠도는 사람을 마주하게 된다면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권해주고 싶다. <출판문화론 2017 / 문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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